피파 좀 한다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알만한 그 분, X사기캐 굴리트😬
커리어 막바지에 첼시에서도 잠깐 활약했었네요.
BBC Sport에 굴리트가 직접 기고한 회고록 느낌의 글을 한번 번역해보았습니다.



By Ruud Gullit MOTD pundit and ex-Chelsea manager
04 June 2020 | Football

셔츠와 타이위로 첼시 유니폼을 입은 루드 굴리트가 1995년 6월 잉글랜드 축구에 등장한다.셔츠와 타이위로 첼시 유니폼을 입은 루드 굴리트가 1995년 6월 잉글랜드 축구에 등장한다.

저는 작별의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저의 첼시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일 겁니다. 저에게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제가 잉글랜드에 온지 25년이 흘렀다는 사실은 제가 매우 늙어버렸다는 느낌을 들게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것은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집니다. 값을 매길수 없는 자유와 같은 무언가를 발견했기에 저는 런던과 곧장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곳은 저의 행복한 공간이었고 첼시 선수들은 저의 ‘사랑스러운 동료들’ -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이었습니다.


1995년 제가 첼시에 합류했을때, 프리미어 리그는 지금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저는 이 리그에 온 첫번째 외국인 선수가 아니었지만 세리에 A와 같이 보다 큰 리그에서 온 이름 있는 선수중에는 첫번째 였습니다.

되돌아 보면, 아마도 그때 여름이 프리미어 리그가 지금과 같은 경쟁 체제로 변화하는 시작점이었었고, 그래야만 했습니다. 이탈리아는 그때 당시 최고였습니다. - 최고의 선수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와 비교 했을때 영국 축구는 매우 기초적인 수준이었고 그들의 리그 수준을 유럽 최고 레벨로 되돌리기 위해 타 리그에서 오는 선수들을 확보하길 원했습니다.

데니스 베르캄프, 다비드 지놀라, 주닝요. 그들 모두 저와 비슷한 시기에 프리미어 리그에 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바라본 방식은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저는 AC 밀란과 삼프도리아에서의 8년간의 생활 후 이탈리아를 떠날 필요가 있었고, 프리미어 리그의 도약과 함께 영국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가장 적합한 장소였으며 새로운 무언갈 하고자하는 저에게 적절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32살, 거의 33살에 가까운, 이었고 오랜 기간동안 최고의 자리에 있어왔으며 많은 경기에서 승리해왔다. 몇몇 사람들은 저의 기량이 많이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단지 돈을 벌고 은퇴를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틀렸습니다.

네덜란드의 공격수 베르캄프 또한 1995년에 인터 밀란에서 아스날로 이적하며 프리미어 리그에 합류했다.네덜란드의 공격수 베르캄프 또한 1995년에 인터 밀란에서 아스날로 이적하며 프리미어 리그에 합류했다.

제가 첼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해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첼시로 갔을때 그 클럽에 대해 심지어는 지역의 일부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라고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글렌 호들이 감독으로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제가 그곳에 간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요.

스탬포트 브릿지를 보기 위해 처음으로 방문했을때, ‘무슨 경기장이 이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최고의 경기장들에서 뛰어왔지만 그곳엔 단 2개의 스탠드만이 존재했습니다. 그곳은 단지 건축 부지가 아닌 다 망가져가는 장소 같았습니다. 당신은 나무로된 널빤지 주위를 걸어야만 했을겁니다.

훈련 시설 또한 제가 이전에 사용하던 것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오늘날 첼시의 설비는 월드 클래스이지만 그 당시 그들은 할링턴의 한 학교를 기반으로한 시설을 사용했습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죠. 단지 나무 벤치와 옷걸이 뿐인 다섯개의 작은 라커룸이 있을 뿐이었죠.

하지만 저는 그곳을 사랑했습니다. 그러한 공간은 제가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한 9살로 되돌아가는듯한 기분을 주었습니다. 환상적이었죠.

물론 제가 합류했을 시점의 첼시는 타이틀 경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었습니다. 그당시 그들에게 챔피언스 리그는 없었죠. 그들은 유럽은 커녕 잉글랜드 리그에서 선두권에 있는 팀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클럽이 가고자 하는 곳, 잉글랜드 축구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도전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AC 밀란으로 가기 위해 네덜란드를 떠날때와 같았습니다. 1987년 AC 밀란에 왔을때, 그들은 유로피언 트로피를 14년간 들어올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곳을 떠날올때는 2개의 유로피언 컵을 거머쥔 후 였죠.

글렌은 저에게 첼시와 그들의 야망을 납득시켜야 했습니다. 그는 그들 또한 여정의 시작에 있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무엇 보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글렌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의 관점에서 그는 최고의 영국 축구선수였지만 영국에서 그는 그리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오 하느님, 그는 당신이 아닌 우리의 운명을 타고난 선수였습니다.’

그는 계약 하기 몇 달 전에 저와의 계약을 원한다며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스킬이 출중한 선수로서 봐왔기 때문에 그가 롱 볼을 구사하는 감독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첼시로 이적 결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언론에서 저는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팀들과의 링크가 있었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이나 갈락타사이가 그러한 팀들이었죠. 그당시에 모나코와 페예노르트, 심지어는 일본의 팀과도 링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팀과도 이야기 한적이 없었고, 1995년 5월 밀란에서 글렌을 만나 계약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첼시, 이곳에 제가 왔습니다.

굴리트는 1989년과 1990년에 AC 밀란에서 두번의 유로피언 컵 타이틀을 차지했다.굴리트는 1989년과 1990년에 AC 밀란에서 두번의 유로피언 컵 타이틀을 차지했다.

저는 잉글랜드 리그에서의 경험이 전무했었지만 피지컬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리그로서의 명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경기를 뛰는 어느곳에서나, 선수들이 심판으로부터 항상 동일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첼시 선수로 갖는 첫번째 기자 회견 이후부터 저는 만반의 준비를 위해 열심히 훈련하였습니다.

제가 AC 밀란에 있을때 종종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게된다는건 이전보다 더 좋은 기량을 보여 주어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비난을 받게 되겠죠. 저는 2번의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가능한한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일관된 태도였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제 자신을 증명하기를 원했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포르투갈로 떠나 골프 코스 옆에 있는 집을 빌려 그 주변을 뛰며 매일 매일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몇 주 후 프리 시즌 훈련을 위해 할링턴으로 돌아왔을때, 저는 좋은 폼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인지하고, 느꼈던 것은 첼시 선수들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좋은 축구를 하기위해 먹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 그것은 그레이비와 감자칩이 곁들여진 스테이크와 소시지였고, 모든것이 일종의 튀김류였습니다. 당신은 결코 좋은 축구를 할 수 없을 겁니다.

음식은 이탈리아와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였고, 또다른 차이는 축구의 스타일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축구는 너무 정직했습니다. 지금 현재는 내가 경고해왔던 거친 태클들이 난무하는데 이제 와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것이 참 웃긴일이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그들을 1마일 떨어진 곳에서 볼수있기때문에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리에A에서의 경험이 있던 저에게는 그것은 예상할 수 있었기에 대응하기 쉬웠습니다. 이탈리에서 그들은 너무나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 같아보일지라도 그들은 그것에 대해 더 영리하게 대처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기대하지 않을때는 아쉬울 것입니다.

물론 제가 잉글랜드로 왔을때 저는 이름이 있는 선수였고 몇몇 선수들은 그들이 저를 타겟으로 삼았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프리미어리그에 온걸 환영해’ 같은거랄까요. 가장 웃긴 건 우리가 윔블던에서 경기했을때 비니 존스가 그와같이 하려고 노력 했을때입니다.

저는 심지어 게임 전부터 비니가 저를 압살하는 것으로 이름을 떨치길 원하는 것을 알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 대비했고, 어느 순간엔 그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발생했죠. 후반전이 시작했을 때, 저는 발목으로 공을 받았고, 그에게 등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저에게 다가 오고있다는걸 거의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태클을하는 순간 저는 그라운드에서 살짝 뛰어올랐습니다. 네 맞아요, 그가 저를 잡기를 원했었지만 그가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죠.

그때 저는 그라운드에 굴렀고 그는 레드 카드를 받았습니다. - 그는 이미 예약이 되어있었습니다. - 그리고 제가 일어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비니, 이제부터 우리 축구할 수 있겠다.” 그는 쉬지 않고 저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다음날 신문에 기사가 났죠. 그는 제가 새끼 돼지 처럼 꽤액 소리를 질렀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글쎄, 거기서 나는 너를 잡았지. 내가 너를 잡았지’라고 생각했죠.

1996년 3월 셀허스트 파크에서 열린 진흙탕속 FA 6라운드 재경기에서 비니 존스가 굴리트에게 도전하고 있다.1996년 3월 셀허스트 파크에서 열린 진흙탕속 FA 6라운드 재경기에서 비니 존스가 굴리트에게 도전하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그 이후로 우리가 친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일에 대해 대해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몇몇 외국 선수가 프리미어 리그로 왔을때 느낄 수 있는 장벽의 예시이며 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탈리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제가 하고자하는 원래의 계획이 꽤 들어 맞지 않더라도 그것은 저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잉글랜드에서의 이점을 제공했습니다.


처음으로 첼시에서 스위퍼 역할로 뛰길 제안한 사람이 글렌은 아니었습니다. - 가능하다면 이탈리아에서 처럼 공격형 미드필더가 아닌 스위퍼 역할로 뛰고 싶다라고 말한것은 저였습니다. 저는 수비쪽 포지션으로서의 저의 커리어를 시작하고자 했고, 그것은 제가 사랑한 역할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그 포지션에서 뛰는 수많은 선수중 하나였고, 문제는 그 당시의 방식이었습니다. 페널티 박스 안에서 긴 볼이 넘어왔을때, 저는 그 볼을 제 가슴에 내려 두고나서 거기서 부터 플레이하려고 했습니다. 글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루디, 아니 아니. 뭘 하려는지는 이해하겠는데 너는 우리팀 수비수들을 그와 같이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하고있어.”

요즘은 그것이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 얼마나 많은 프리미어 리그 팀들이 수비수들로부터 플레이를 시작해나가는지 보세요. 그때 당시에 수비수들은 항상 헤딩을 하거나 가능한한 멀리 볼을 클리어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후방에서 그들 주위로 패스 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패스를 원치않았고, 그래서 글렌은 아니라고 말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는 저에게 조금 더 앞쪽으로 포지션을 이동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변화가 만들어진 게임을 기억하진 않지만 나의 동료였던 가빈 피콕은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제가 미드필더로 뛰었던 시기에 저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드, 넌 어떻게 항상 공간을 만들어 내는거야?” 그것은 단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었기때문에 그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 당신은 단지 특정 상황에서 볼이 어떻게 흘러 나오는지를 배우면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특정한 곳에 머무르고 있다면 공간이 생길 것입니다. 세리에A에서 보다 영국에서 그러한 공간 창출의 기회가 더 많았던것 같습니다.

그리운드 밖에서 저는 더 많은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이탈리에서 지냈던 시간내내 모든것이 너무나 치열했습니다. 특히 밀란에서 저를 취재하려는 수많은 기자들 떄문에 외출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저를 쫓아다니거나 저에게 무언갈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숨통을 틔울수 있었습니다.

밀란과 삼프도리아에서 저는 매 경기 이전에 트레이닝 캠프에 참여하곤했습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지금은 대부분의 날에 하나의 훈련 세션만 있을뿐이고, 심지어 일요일은 쉬죠. 그렇기에 저는 사람들을 만나며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일상 생활이 있었던거죠.

첼시의 95-96시즌 동안 굴리트는 스위퍼, 미드필더 또느 공격수로 경기에 참여했다.첼시의 95-96시즌 동안 굴리트는 스위퍼, 미드필더 또느 공격수로 경기에 참여했다.

처음에 저는 호텔에만 머물렀습니다. - 저는 심지어 이곳이 어딘지도 몰랐습니다. 도심내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공항 근처였습니다. 런던 중심가로 드라이브하기로 결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런던은 운전석과 방향이 정반대였기때문에 드라이브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매우 복잡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피카딜리 서커스로 드라이브를 갔을때, 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은 나를 위한 곳이다.’ 역시나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영국 축구가 이탈리아와 다른 또 하나의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은 긍정적이었습니다. - 관중, 그리고 관중석에서의 태도입니다. 저는 첼시 팬들뿐만 아니라 관중들과 다른 형태의 유대감을 느꼈습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그들은 선수들이 보여주는 플레이에 더욱 환호합니다. - 만약 당신이 그라운드위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보여준다면, 관중들은 열광할겁니다. 물론 이탈리아에서도 관중들은 열정적이었고, 경기장은 늘 가득찼지만 그들은 대다수의 선수들이 동일한 방식으로는 결코 반응하지않는 것들을 보는것에 익숙했습니다.

저는 곧장 첼시팬들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첼시에서의 첫번째 경기에 드레드락 가발을 쓴 그들을 기억합니다. 첼시의 서포터들은 언제나 환상적이었고 심지어 제가 첼시를 떠날때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저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저와 함께한 방식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언제나 보물과 같은 것일겁니다.

첼시 선수들과 친구를 만드는 일 또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첼시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순간부터 그들을 항상 ‘사랑스런 아이들’ 이라 불렀습니다. 왜 ‘사랑스런 아이들’이라고 했을까요? 글쎄요, 저는 영국의 TV 쇼인 ‘It Ain’t Half Hot, Mum’의 광팬이었고, ‘사랑스런 아이들’이라는 단어는 그 프로에서 부대선임하사관으로 출현하는 윈져 데이비스가 그의 부대원에게 사용했던 말이었습니다.

제가 첼시에 합류했을때, 첼시 선수들은 제가 영국의 유머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놀라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Mr Cool이 되고자 했습니다. - 하지만 저는 1907년대 네덜란드 TV에서 방영하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보며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라커룸에서 프랭크 스펜서나 ‘Fawlty Towers’, ‘Are You Being Served’, ‘George and Mildred’ 에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 모든걸 사랑했었죠.

그것은 제가 적응 하도록 도와주웠습니다. 네덜란드의 락커룸에서는 모두가 그를 최고라고 알고 있으며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이만 감독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당시 영국에서는 모두가 웃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의 새로운 팀 동료들과 잘 지낼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적응하길 원했기에 그러한 원만한 관계가 이뤄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축구의 그 부분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 당신이 새로운 클럽 혹은 새로운 국가로 이적할때, 무엇보다도 언어를 먼저 이해해야하며, 그리고나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면 당신은 얼마지나지않아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첼시에서 저는 그들 모두와 함께 레스토랑이나 콘서트에서 시간을 보냈고, 골프도 치곤했습니다. 아주 많이요. 저는 사실상 첼시에서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이와 같이 지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그러했던것 처럼,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을 통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곳에서의 대부분의 경험들은 긍정적이었지만, 한가지 사건은 분명히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첼시로 이적하고나서 1년 후 선수겸 감독이 되었습니다. 1996년 글렌 호들이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하며 첼시를 떠났을때였죠. 저는 잔플랑코 졸라, 잔루카 비알리, 로베르토 디 마테오, 프랑크 르뵈프를 영입했습니다. 1997년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98년 2월 프리미어 리그에서 2위에 올라있었으며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8강에 진출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PSV 아인트 호벤의 야프 스탐과 레인저스의 브리안 라우드루프와 협상중에 있었죠.

경질되기 전날, 저는 제 코치 중 한명이었던 그윈 윌리엄스와 2명의 첼시 선수 플랑코 졸라, 케빈 히치콕과 골프를 치고있었습니다. 저는 라우드루프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엔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저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이자 저를 가장 많이 도왔던 그윈은 무슨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고있었으며 그들이 저를 해고할 생각이었다는것 또한 알고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떨어뜨려놓기 위해 저와 골프를 치고있었고, 제가 라우드루프가 있는 곳에는 가지 않았다는것을 확실히 했습니다.

경질을 당하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었고 그들이 그렇게 한것에 대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의 계약 요구 사항이 지나쳤다고 했지만 그건 말도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들은 저와의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찌됐든 그들은 저를 해고 할 계획이었던 거죠. 하지만 최악의 일은 그윈이 저에게 했던 짓입니다. - 저는 모든 시간을 함께한 누군가에게 그와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어떠한것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고,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기때문에 조심하라고만 이야기했습니다.

이 일은 저의 커리어와 삶을 통틀어 누군가가 저에게 했던 일 중 최악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실망이었으며 저는 그것에 대해서는 그를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그럴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잊었습니다. 경질 당한것에 대해 아직까지 화가 나냐구요? 아닙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에 그것을 받아들였고, 이겨냈습니다. 잉글랜드로 온것이 기쁘냐구요? 물론이죠.

그것은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고, 뉴캐슬 감독으로 있었을때도 저는 같은 것을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왔을때 잉글랜드에서의 삶은 저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축구에 대한 저의 생각을 향상시킨다라고 느꼈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와 같이 느낍니다.

1997년 웸블리에서 열린 FA컵 결승에서 첼시는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2대0으로 승리했다.1997년 웸블리에서 열린 FA컵 결승에서 첼시는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2대0으로 승리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FA컵에서 우승했을때입니다. AC 밀란 최초로 유로피언 컵에서 우승했을때도 믿을 수 없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잊을 수 없죠. 트로피를 들어올린다는 측면에서 저는 첼시라는 새로운 클럽의 새로운 감독이었습니다. 우승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갑작스레 일어났고, 그것은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첼시의 시작에 제가 있었다는것이 또한 프리미어 리그가 이루어나갈 일들을 보았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첼시와 프리미어 리그 모두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고, 그들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딘선가 시작해야 했습니다.

제가 왔을때 그것은 잉글랜드 축구를 위한 새로운 방향의 일부였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더믹으로 인해 오늘날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일지 모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주의를 촉구하는 일이 되어야만 하고 모든 클럽들은 그들 스스로를 다른 방식으로 관리하는것에 생각해야만 합니다.

제가 보았을때 영국 축구의 문제는 너무나 많은 돈을 버는 선수들이 있고, 그렇게 할만큼 좋은 선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스타 선수가 큰 돈을 번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선수들을 보고있습니다.

자본은 프리미어 리그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었지만, 경쟁에 있어 이와 같은 일시적인 문제들이 다시 발생한다면 그들이 지금과 같은 클럽 운영과 지출을 지속할 경우에 대다수의 클럽들이 파산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를 기울여야하며 그들의 모델을 다시 한번 변화시켜야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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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Chelsea: Ruud Gullit looks back fondly on his Premier League arrival, 25 years on